우리동 역사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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수진1동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세촌면 수진동 지역이었다.
1914 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새우개·새터말·안말·신답·작은능 ·궁말 등의 자연부락을 병합하여 `수진리`라 칭하고 중부면에 편입되었으며, 1971년 경기도 성남출장소 당시 중부면에 속하게 되었다.
1973년 7월 성남시제 실시에 따라 탄리 일부 지역인 지금의 수진1동사무소 앞 `탄리로`의 서편으로 이어지는 지역이 수진동 관할이 되었다.
1976년 10월 11일 수진동은 수진동 내의 `제일로`를 경계로 동 편에 수진1동, 서편으로 수진2동으로 분동 되었으며 그후 1989 년 5월 수정구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.
洞名의 유래는 세종대왕의 아들인 평원대군이 사망하자 영장 산 남쪽에 장사지내고 그 묘소를 관리하는 壽進宮을 지은 데서 비롯된 것이며 궁말·궁촌·수진궁·수진동·수진리 등으로 불리우다가 성남시제 실시 당시 수진동으로 되었다.
1914 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새우개·새터말·안말·신답·작은능 ·궁말 등의 자연부락을 병합하여 `수진리`라 칭하고 중부면에 편입되었으며, 1971년 경기도 성남출장소 당시 중부면에 속하게 되었다.
1973년 7월 성남시제 실시에 따라 탄리 일부 지역인 지금의 수진1동사무소 앞 `탄리로`의 서편으로 이어지는 지역이 수진동 관할이 되었다.
1976년 10월 11일 수진동은 수진동 내의 `제일로`를 경계로 동 편에 수진1동, 서편으로 수진2동으로 분동 되었으며 그후 1989 년 5월 수정구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.
洞名의 유래는 세종대왕의 아들인 평원대군이 사망하자 영장 산 남쪽에 장사지내고 그 묘소를 관리하는 壽進宮을 지은 데서 비롯된 것이며 궁말·궁촌·수진궁·수진동·수진리 등으로 불리우다가 성남시제 실시 당시 수진동으로 되었다.